삶의 흔적, 그리고 치유
아무리 깊게 누르고 무겁다 해도 자국이 나지 않는 것이 있다. 뱀이 바위를 기어간 자리와 배가 바다를 지나간 흔적은 남지 않는다. 새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도 그렇고, 물고기가 바다 속에서 헤엄친 자국도 알 길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그건 바위와 하늘과 물이 워낙 견고하거나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드넓고 깊기 때문이지 않은가 싶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다면, 인생 살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부딪힌 자국들이 지워지지 않는 멍이 되거나 새살이 돋지 않는 상처로 남아 아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인생살이의 자취가 새겨진다. 프로이트는 이 마음의 흔적을 따라 ‘마음의 지하실’로 내려간다. 그 마음이 숨겨놓은 진실을 찾기 위해서다. 자칫 지나치기 쉬운 실마리 하나를 가지고 영혼의 미로(迷路)를 통과해서 유년의 비밀을 찾아내기도 한다.
융은 또 어떤가? 그는 인류 최초의 시간에 대한 기억도 우리 영혼의 틈새 속에 남겨져 있다고 여긴다. 그렇게 보자면 인간의 영혼도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긴 세월 동안 유전되는 셈이다. 영혼의 저 깊고 깊은 지하창고에 담겨 있는 무진장한 기억들은 모두 우리 한 사람의 평생으로는 저장할 수 없는 양과 내용을 지니는 격이다. 그것들도 사실 따져보면, 태고의 충격과 상처 또는 갈망과 아픔이 새겨진 결과다.
이제는 무속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격하된 굿도 달리 말해보자면, 이런 마음의 지하창고로 찾아가 닫혀 있던 문을 여는 일이다. 정신분석학이나 분석심리학과 마찬가지로 병이 된 뿌리를 캐내어 치유의 위력을 발휘해보고자 함이다. 특히 사랑하는 이가 죽어 그와 다시 소통하고 싶다 못해 병이 들면 그 사무치는 소망을 이뤄내려는 에너지는 이 굿을 따라갈 것이 없을 것이다. 그것도 잘 살펴보면, 역시 당사자의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새겨진 고인의 흔적이 그 영혼과 몸을 통해 나타나는 일이다.
‘헬로우 고스트’라는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유치한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반전은 관객들에게 하염없는 눈물을 쏟게 한다. 우리 몸에 새겨진 저 아득한 기억들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고, 그걸 상처가 아니라 치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본 감독의 마음 깊이가 고맙다. 알고 보면 바위 하나에도 오랜 고고학적 기억이 새겨져 있다. 바위가 어느 날 갑자기 바위가 된 것이 아니다.
2011. 1. 18. 서울메트로 신문
성공회대 김민웅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