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귀족 출신이 아닙니다(엄상익변호사의 휴먼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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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그랜드볼룸은 천여 명의 변호사가 모여 회장을 뽑는 축제장이었다. 신영무 대한변협 협회장 후보의 첫 마디는 자신이 귀족이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법조계의 공기가 달라졌다. 서울회 회장 후보 중 한 명은 변호사들에게 근로기준법상의 권리를 찾아주겠다고 소리쳤다. 여성변호사들이 출산으로 목이 잘리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변호사가 지식노동자인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회장 후보들의 연설을 들으면서 과거로 생각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 경우는 머리도 둔하고 의지도 약했다. 법서를 펼치고 십 년세월이 가까운 데도 시험에 낙방했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한테 조정을 요청했다. 변호사를 하지 않겠으니 그냥 시험에만 합격시켜 달라고 했다. 그렇게만 되면 연탄배달을 하고 살아도 평생 감사하겠다고 약속했다. 변호사 자격증은 나의 열등감과 절망의 치료제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해에 합격했다. 그때의 약속은 이후 배의 바닥짐처럼 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세상은 불공평했다. 판사출신의 옆 사무실은 손해배상사건과 형사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검사장 출신의 뒷방은 전화 한 통화로 억대를 받는다고 자랑했다. 파리를 날려도 난 할 말이 없었다. 그 분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변호사를 접고 공무원 생활도 몇 년 해보았다. 그것도 맞지 않았다. 인간의 정신을 틀 속에 밀어 넣어 붕어빵 같이 만드는 곳이 공직사회였다. 로펌에 간 적도 있었다. 매달 사건유치실적과 수입액이 그래프로 그려져 나왔다. 나는 꼴찌였다. 로펌은 사건유치를 위해 로비 대상자를 할당했다. 사장들은 자기네 비자금을 떼어주고 세금을 내면 남을 게 없을 텐데 그래도 좋겠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은행장은 공짜라도 고문을 하겠다는 변호사가 줄을 섰다고 큰소리쳤다. 그곳도 있을 곳은 되지 못했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위기였다.
대한변협 협회장의 인터뷰 기사를 봤다. 젊은 변호사들이 허허벌판에 버려졌다고 한탄하면서 경력 변호사 평균연봉이 3천7백만 원이라고 한다. 나는 변호사단체의 지도자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의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칭 물 좋던 시절 박원순 변호사는 한 달 백만 원 수입으로 버티면서 시민운동을 해보겠다고 내게 말했었다. 그가 만든 재단의 젊은 변호사들은 지금도 이백만 원 이하의 급료를 받으면서 사회적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변호사 자격증에 어떤 의미를 둘 것인가에 따라 삶의 모습도 달라진다. 잘 먹고 으스대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는 경우도 봤다. 조폭 두목의 집사가 되기도 하고 사기꾼의 노리개가 된 여성변호사도 봤다. 꽃이 피기도 전에 벌레가 먹은 모습이었고 그들은 법의 창녀였다. 사다리를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다 놓았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 변호사가 변호사다울 때 세상은 저절로 찾아온다. 우리 모두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같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