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성인(聖人) 강요하는 사회

하일도 2010. 3. 18. 11:55

공자가 살던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법에는 다른 나라 제후에 예속돼 신하나 첩 노릇을 하는 노나라 사람을 구해내면 보상금을 주는 규정이 있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사람을 구해 놓고도 돈을 받지 않았다. 공자가 탄식했다.“지금 노나라에는 빈곤한 자가 많은데, 보상금 받는 일이 청렴하지 못한 짓으로 여겨진다면 앞으로 누가 그 같은 일을 하겠는가.” 또 다른 제자 자로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줬다. 그 사람이 소를 선물로 주자 자로는 기꺼이 받았다. 공자는 기뻐했다. “앞으로 노나라에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는 일이 굉장히 많겠다.”

중국 명나라 때 사람 원황이 쓴 ‘요범사훈’에 나오는 일화다. 좋은 뜻을 행동에 옮길 때라도 자기 일신의 청렴만을 따지지 말고 그 파급 효과가 사회에 어떻게 나타날지 숙고해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선행(善行)의 기준을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정치가로서의 공자의 탁월한 식견에 감탄하게 된다. 2000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는 그 옛날, 세상의 이치가 모두 ‘성인연(聖人然)’하는 데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지도자가 시민들에게, 시민들이 지도자에게 ‘성인’이기를 강요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요즘 별명은 ‘교수님’이다. 좋은 의미가 아니다. 어딜 가나 국민들을 가르치려고만 든다고 해서 이에 식상한 언론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건강보험 개혁에 정치적 생명을 건 오바마는 15일 지지자들을 모아놓고 선거유세와 같은 사자후를 토했다. “나는 정치는 모릅니다. 그저 옳은 일을 할 뿐입니다.” 그는 보험업계의 두터운 로비에 흔들리지 않고 수천만 무보험자들을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선의(善意)를 강조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힘들게 막고 있던 내 보험료가 더 오를까 걱정하는 소시민들까지 도덕적 죄책감을 감수하게 했다. 오바마는 자기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을 독려하기보다 처지가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데 주력했어야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5월 오바마가 부인 미셸과 함께 뉴욕 뮤지컬 데이트에 나섰을 때 공화당은 ‘적절치 못한 여흥’이라고 맹비난했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는 아이티 지진이 발생하자마자 “왜 노벨 평화상 상금을 기부하지 않느냐”고 채근댔다. 오바마 부부가 그들의 두 딸을 사립학교에 보낸 사실은 여전히 시빗거리다. 비난의 소지는 있다. 그러나 ‘대통령 오바마’에겐 부인과의 약속, 가문의 부귀, 아이들의 안전을 고려할 기회가 없어야 하는 것일까. 아마 ‘인간 오바마’에게 그것들은 가장 중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자기만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면 끝이라고 믿는 지도자는 없는가.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많은 사람이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당선되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걸 던지고 바꾸겠다는 사람보다 지금 살아온 모습대로 성심껏 해보겠다는 사람이 우리에게 더 필요할 수 있다. 공자의 가르침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