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법정에겐 가고 박춘석에게 안가고

하일도 2010. 3. 22. 11:22

한국사회는 1주일 새에 위대한 사람 2인을 떠나보냈다. 법정 스님이 길의 안내자라면 작곡가 박춘석은 동반자였다. 1960~80년대는 국민 대부분이 힘들었던 개발연대였다. MP3도 CD도 없었다. 사람들은 숙소·사무실·공장에서 라디오와 레코드를 틀어놓았다. 가수와 작곡가가 없었더라면 한국인은 그 세월을 헤쳐 나오지 못했을지 모른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들으며 여공들은 새벽까지 재봉틀을 돌렸다. 남진 닮은 대학생과 데이트하는 걸 꿈꾸며···. 시골 처녀들은 나훈아를 들으면서 서울로 간 사랑을 기다렸다. “돌담 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물레방아 도는데’는 처녀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연애편지였다.

남정네들에게는 패티 김과 정훈희·하춘화가 있었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 비라도 내리는 날 패티 김의 ‘초우’ 가 흐르면 남자들은 소주잔을 기울였다. 국가는 경제개발과 수출로 달려가고 자신은 어딘가 알지 못하는 사랑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끝없는 하늘 멀리 별은 멀어도···” (정훈희, ‘별은 멀어도’) “파란 물이 잔잔한 호숫가의 어느 날 사랑이 싹트면서 꿈이 시작되던 날···”(하춘화, ‘호반에서 만난 사람’)···공장 기숙사에서, 전방부대 막사에서 이런 노래들을 들으며 70년대의 남자들은 80년대의 꿈을 키웠다.

남자와 여자를 떠나 국민이 대중가요를 사랑했다.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서 살고 있나.”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는 떨어져 사는 사람들을 울렸다. 중동 사막의 아빠들이 울고 서울의 가족들이 울었다. 이 노래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러기 아빠들을 울리고 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얌전한 몸매에 빛나는 눈···.” 김란영이 불렀고 남한의 이산가족들이 울었다. TV방송국이 이산가족 찾기를 하면서 심술궂게 이 노래를 트는 바람에 시청자들이 눈물을 훔쳤다.

이 모든 노래를 지은 이가 박춘석이다. 15년 전 세상을 떠난 길옥윤은 3500여 곡을 남겼다. 박춘석은 2700여 곡을 지었으니 둘을 합치면 6200여 곡이다. 이런 곡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한국인은 개발과 시련의 강을 건너왔던 것이다. 법정은 수많은 에세이와 법문으로 한국인에게 영혼의 샘물을 부어주었다. 길옥윤과 박춘석은 애잔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한국인의 가슴을 적셔주었다. 세상에 대한 기여에서 그들이 법정보다 못하다고 누가 얘기할 수 있나. 오히려 서민대중에게 다가간 거리로 따지면 작곡가들이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법정과 박춘석의 죽음을 기리는 정치 지도자들의 풍경이 사뭇 다르다.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많은 인사들이 길상사로 가서 법정을 조문했다. 반면 박춘석의 상가엔 별로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임태희·유인촌 장관, 김부겸·원희룡 의원, 함영준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 등이 거의 전부였다. 정치 지도자들이 ‘어떤 국민’의 상가를 조문하느냐는 대중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그들이 영정(影幀)에 고개 숙이는 기준은 무엇인가. 종교 지도자는 조문하면서 그 사람만큼 국민의 사랑을 받는 위대한 대중 작곡가는 왜 조문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박춘석은 힘들고 외로운 15년 투병 끝에 길을 떠났지 않은가. 대통령이나 존경 받는 정치 지도자가 빈소를 찾아 흐느끼는 패티 김과 이미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면, 대중문화인과 많은 국민의 마음이 포근했을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오랜 세월 국민과 함께 했던 대중문화인에게 좀 더 다가가야 한다. 정치가 닦아주지 못하는 국민의 눈물을 그들이 닦아주지 않는가. 최진실이 그러했고, 길옥윤이 그러했으며, 박춘석이 그러했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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