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대문호인 소동파! 그는 고통스럽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나, 정작 그 자신은 주위를 즐겁게 하는 낙천가이자 거침없고 큰 기개를 가진 대장부였다. 이렇듯 그가 소탈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선에 대한 깊은 소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좌천과 유배로 얼룩진 인생 속에서도 선에 기대어 유유자적하게 살아갔던 소동파의 글과 삶이 때로는 흐뭇하게, 때로는 눈물겹게 펼쳐진다!
팔방미인 소동파, 선에 취하다 선종은 선을 주된 수행 방식으로 삼고 있는 불교의 법문이다. 남북조 시대 보리달마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들어와 선을 전하면서 중국 선종의 시조가 되었다. 인간 내면의 중시, 지혜의 추구, 욕심을 버린 담박함과 같은 특성을 가진 선은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다 실의에 빠진 중국 문인들의 상처를 감싸 안으며 그들과 끝없는 인연을 맺었다. 선은 문인들에게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정신을 자유로이 날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적벽부」를 지은 중국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소동파는 이런 문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매력 있는 사람의 하나이자 선과 인생을 가장 조화롭게 아우른 선인으로 손꼽힌다. 소동파가 만들어낸 갖가지 에피소드들과 그가 지어낸 뛰어난 작품들은 선이 평범한 삶에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보여준다. 그는 평생을 좌천과 유배로 보내면서도 끝내 쓰러지거나 꺾이지 않았다. 결코 남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으며, 자기연민에도 빠지지 않은 채 의연하게 현실에 대처했다. 세속적 가치로부터 초연할 수 있게 한 불교의 선사상이 극도로 열악한 유배생활을 꿋꿋하게 버텨내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시인 소동파를 매개로 하여 선에 다가가는 쉽고 빠른 길을 독자들에게 안내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동파의 선사상을 통해 오늘을 사는 평범한 우리들이 낙천적이고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니, 도道는 평상에 있다” 소동파가 주선하는 선과의 즐거운 만남 그동안 소동파와 관련된 책이 그의 문학세계에만 집중되었다면 『소동파, 선을 말하다』는 소동파의 인생을 불교와 선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조명한다. 그는 수많은 승려들과 교제하며 재미있는 일화들을 만들어냈고, 참선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시와 문장에는 선의 풍미가 짙게 깔려 있다. 따라서 그동안 간과해왔던 소동파의 선사상을 짚어보는 것은 소동파라는 한 인간을 제대로 바라보는 길이자 중국 대문호의 문학을 올바르게 평할 수 있는 길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가의 사상을 통해 우리의 정신세계 또한 깊어지는 길인 것이다. 선을 통해 바라본 소동파의 인생은 크게 ‘참선 이전’, ‘참선 할 때’, ‘참선 이후’의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선을 접하며 마음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시기, 인생의 무상함을 통감하고 본격적으로 선의 길에 접어드는 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이른바 ‘인연을 따르는’ 시기를 펼쳐 보인다.
1장 선향을 좇다 풍진의 그물에 잘못 들어가 신세가 고달프다 중국의 선비들이 그렇듯이 소동파는 자신의 정치적인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벼슬길로 나아간다. 하지만 강직한 성격을 숨기지 못하고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신당파를 비판하다 미움을 사게 된다. 이때만 해도 그에게 선은 세상사의 어지러움에서 벗어나 마음을 밝고 즐겁게 영위해나가는 수단이었을 뿐이지 인생을 모두 걸고 탐구해야 하는 길은 아니었다.
2장 선의 길에 들어서다 분별을 타파하니, 구기자와 국화도 달고 맛있다 소동파는 모함을 받아 죽음 직전까지 가는 ‘오대시안’을 겪으며 인생의 무상함을 통감하고 본격적으로 선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이때의 소동파는 대나무 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도롱이로 안개비를 막는 시골 촌로의 삶을 살았지만 아무런 거리낌이나 두려움이 없었다.
3장 선과 하나 되다 꿈같으면서도 꿈이 아니니, 모든 일은 다 인연이다 이전까지는 현실의 속박을 벗어나 출세간의 초월적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제는 더 이상 억지로 노력하지 않는다. 세간과 출세간을 모두 넘어선 원융의 삶, 즉 꿈이면서 꿈이 아닌 인연을 따르며 살아간다.
이러한 소동파의 삶과 사상은 빠르게 돌아가는 생활 속에서 세간의 쾌락과 성공의 욕망에만 사로잡혀 쫓기듯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나아가 지나친 경쟁으로 늘 불안감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현실의 고난을 견디는 힘과 소박한 생활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가져다준다. 독자들은 소동파에게서 세상의 명예나 이익에 담백한 마음, 악조건 속에서도 주어진 일에 열성을 다하는 마음,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는 선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소동파의 문학이 우리 선조들의 심금을 울렸듯이, 그의 굴곡진 인생과 그 인생을 통한 깨달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마음에도 큰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
최고의 문장가에서 선 수행자가 된 소동파,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빛나는 작품을 통해 깨우치는 41가지 선의 지혜 “세상일은 한바탕 꿈이니 인생은 얼마나 처량한가?” 날아가는 기러기는 그림자가 없고, 봄날의 꿈은 흔적이 없다. 이 이치를 알면 얻고 잃음에 집착하지 않고, 유감이나 원망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일은 봄날의 꿈과 같아서 흔적이 없지만 강성의 백주 석 잔 맛이 진하고 시골 늙은이의 창백한 얼굴이 한 번의 웃음으로 따스하니, 마음이 담박하면 소박한 백주나 시골의 벗도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법이다. -p113
“어디를 가든 즐겁지 않으리!”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변화는 마치 팔을 한 번 굽혔다 펴는 것처럼 일상적이다. 도대체 누가 가난하고 누가 부유한가? 어느 누가 영원히 아름답거나 추할 수 있겠는가? 먹고 입는 것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것은 마치 꿈속에서 하는 소리와 매한가지이니 훗날 죽으면 그저 똑같이 흙으로 썩기 마련이다. 술지게미를 먹고 탁주를 마셔도 취할 수 있고, 과일과 채소, 풀과 나무를 먹어도 배부를 수 있으니 내가 어디를 간들 즐겁지 않겠는가? -p117
“바람을 영접하고 달을 맞이하니, 사물과 내가 원만히 융합하네” 손님도 저 물과 달을 알고 있는가?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지만 일찍이 다 흘러가 버린 적이 없고,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이 저와 같지만 끝내 없어지거나 자라지는 않는다. 변화하는 시각에서 보면 천지도 한순간이 되지 못하고, 변화하지 않는 시각에서 보면 만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그렇다면 또 무엇을 부러워하겠는가? -p131
소동파, 그는 누구인가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본명이 식(軾)이고 자(字)가 자첨이며 호가 동파거사(東坡居士)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그의 호를 사용한다. 소동파는 대문호이자 정치인일 뿐 아니라 경학, 서예, 그림, 요리에도 조예가 깊어서 생전에 이미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는 스물두 살 때 이미 구양수로부터 “이 늙은이는 이제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을 수 없소”라는 칭찬을 들었을 정도로 출중한 문장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스물여섯 살 때 그는 첫 관직에 부임하기 위해 봉상(鳳翔, 지금의 섬서성 봉상)으로 가는 도중 <면지의 일을 회고한 자유의 시에 화답하여(和子由澠池懷舊)>라는 시를 지어 인생의 허망함에 대해 읊었다. ‘설니홍조(雪泥鴻爪)’라는 성어의 유래가 된 이 시를 보면 그는 젊은 시절부터 벌써 세속적인 것의 무상성과 무가치성을 간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봉상에서 3년 동안 근무한 뒤 조정으로 들어갔으나 서른여섯 살 때 왕안석(王安石)을 비롯한 신법파 인사들과의 정쟁을 피하기 위해 자청하여 지방관으로 나가버렸다. 이 무렵 그는 상소문을 통해 신법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지적하기도 하고 문학작품을 통해 도탄에 빠진 농민들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고발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집권자인 신법파 인사들에게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마흔네 살 되던 해에 마침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신법파 인사들이 소동파의 시문 가운데 왜곡할 수 있는 것을 다 들춰내어 악랄하게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소동파는 황주(黃州, 지금의 호북성 黃岡)로 유배되었다. 황주로 유배된 직후 소동파는 상당히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를 극복하고 유배생활을 한 4년 내내 대체로 초연한 태도를 견지했다. 세속적인 일에 초연할 수 있게 하는 불가적(佛家的) 가치관과 도가적(道家的) 가치관 덕분이었다. 이 4년은 그의 사상이 한층 원숙해진 시기였고 문학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만인이 주지하는 「적벽부(赤壁賦)」 등의 많은 걸작이 이때에 지어졌으며, 친구의 도움으로 얻은 옛날의 군사 주둔지를 개간하여 동파(東坡)라 명명하고 동파거사(東坡居士)라는 자호(自號)를 지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쉰 살 되던 해 6월, 4년 반 만에 유배에서 풀려난 소동파는 조정으로 들어가 요직을 맡다가 정쟁을 피해 지방관으로 나갔다가를 반복하다 쉰아홉 살 때 또다시 정적들의 대대적인 모함을 받아 다시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이번에는 황주보다 훨씬 멀고 낙후한 혜주(惠州, 지금의 광동성 혜주)였다. 혜주에서 2년 반을 지낸 예순두 살 되던 해 여름, 소동파가 마음 편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정적들이 그를 담주(儋州, 지금의 해남성 담주)까지 보내버렸다. 담주는 외지 사람이 살기 힘든 열대지방이었다. 소동파는 예순다섯 살 되던 해에 6년이 넘는 유배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북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러 달에 걸친 무더위 속에서의 원거리 이동으로 피로가 누적된 나머지 마침내 병에 걸려 이듬해 7월, 예순여섯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