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메구(꽹과리)의 추억

하일도 2019. 1. 28. 17:07


메구(꽹과리)의 추억


1. 내가 자란 곳은 시골인 구미 옥성면 덕촌동으로 어릴 때부터 동리에서 명절이나 집안에 경사가 있으면 풍물놀이 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마을 어르신들과 장년들이 주축이 되어 메구, 징, 북, 장구를 치고 이들의 장단에 맞춰 상모꾼이 상모 돌리고 뒤이어 주민들이 나와 춤을 추면 어린 우리도 흥겨워 신이 났다.

구정때면 정월 보름까지 이같은 풍물놀이가 이어진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한해의 안녕과 재해가 없기를 기원하는 지신 밟기를 한다. 그러면 그 집에서 술이며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여유가 있는 집안은 풍물을 하는 사람들에게 선물, 주로 고무신이나 수건 등을 돌리기도 한다.

특히 우리 마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어르신은 메구를 치는데 경북에서 소문난 사람이다. 군(郡)에서, 나아가 도에서까지 명성을 떨쳤고, 상도 많이 받은 것으로 안다. 그 분의 메구 솜씨는 조용히 물이 흐르는듯 하다가 갑자기 빨라지고 폭풍우가 되어 산천을 집어 삼키는듯  웅장하기도 하다. 흥이 나면 메구가 깨어지도록 두드린다. 너무 열정적으로 치다가 깨어지는지 일부러 깨어진 소리를 내려고 그러는지 알 수는 없다. 같이 치는 상쇠분들은 좀체로 께어지게 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일부러 깨뜨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최고 경지에 오른 장인의 특권이 아닌가 생각도 한다. 깨어진 메구에서 나오는 탁한 소리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 본 상쇠 중에서 최고다. 이미 오래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나도 이같은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러다보니 시간만 나면 나무를 톱으로 베어 그럴 듯하게 깍아 메구 채를 만들어 양은 냄비나 깡통, 판자 등을 두드리면서 박자를 맞추어 보기도 하였고, 이를 본 어른들로부터 제법이라고 칭찬까지 듣기도 하였다.

비록 메구를 직접 쳐 볼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보고 느끼고 어느 물건이나 두드리다 보니 풍물에 담긴 박자와 흥을 몸에 자연 체득되었다.

어릴 때는 항상 시골에서 자라서 농사를 지으면 시골에서 늙어갈 줄 알았고, 나도 자라서 장년이 되면 상모도 돌리고  메구도 치는 상쇠가 되어 풍물놀이의 일원이 되고자 하였다.

그런데 객지에서 고등학교, 대학을 다니고, 서울에서 생활을 하다보니 풍물놀이를 볼 기회가 멀어지고, 또 세월이 가면서 시골에서 이런 풍물놀이 풍속도 점점 사라져 갔다.


2.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끔 텔레비젼에서 사물놀이를 공연을 보면서 과거 내가 보았던 고향의 풍물놀이와 비교해 본다. 그러나 큰 마당에서 다양한 악기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뛰어 노는 풍물놀이와 작은 실내공간에서 4가지 악기인 메구, 징, 북, 장구만 가지고 노는 사물놀이는 많이 다르다.  

풍물놀이에 비춰 장단도 단순하고 흥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사물놀이는 보고 과거 어릴 때 체득한 풍물놀이의 감흥을 되살아 나기도 하였다.

오래전에 우리 김천고등학교 동기들이 기수별 축구대회 주관기가 되었고, 내가 서울 회장이 되다보나 행사를 마치고 나에게 김천 주물 장인이 만들었다는 메구를 하나 선물로 받았다. 김천은 메구나 징을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선산에서도 메구나 징은 김천 장에 와서 사가져 간다.

또, 김천 빗내농악 하면 유명하다. 빗내농악은 선산 무을 수다사에서 스님이 만들었다고 하며 그 절의 상쇠가 김천(금릉 개령) 광천(빗내)에 와서 살면서 이를 다듬었다고 한다.

무을 수다사 스님이 만든 선산 농악의 내용은 고려 왕건이 선산 앞 발갱이 들에서 견훤의 아들 신검을 물리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 한다. 내가 자란 곳도 무을면과 접한 옥성면이라 결국 산산 무을농악으로 통한다.

고등학교 동기 아버지가 김천주물점을 하였고, 그 장인이 만든 메구를 선물로 받으니 얼마나 반가웠든지 집으로 와서 가끔 조용하게 뚜드려 보기도 하고, 외지로 나갈 때 가지고 나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신나게 두드려 보기도 하였다. 가끔 야외 모임에도 가지고 나가 두드려 보기도 하였다.

그러다 1992년 지금 사는 마포구 성산동 집에 이사를 한 후 메구를 찾아 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큰 보배로 알고 간직해 왔는데... 아쉬웠지만 그 메구는 나와 함께 할 운명은 아닌가 보다 하고 미련을 버리기로 하였다.

그 후 파주 킨텍스에서 전국 지역 물건 출품 행사가 있었다. 구미시에서도 출품을 한다고 하여 킨텍스에 가서 각 지역에서 만든 물품을 보다가 김천 박스에 가니 김천 장인이 만든 방자유기 메구가 눈에 들어와 마음에 꽂혔다.

내가 그 메구를 만지며 아쉬어 하면서 함께 한 고향 선배에게 과거 선물로 받은 김천 메구를 잃어버려 미련이 남는다고 하자 그 메구를 선물로 사 주었다. 그래서 다시 김천 장인이 만든 방자유기 메구를 가지게 되었다.

다시 메구를 가지고 각종 야외 모임이 있을 때 가지고 가서 신나게 두드렸다.


3.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서 탄핵소추되면서 첫 탄핵반대 태극기 집회에 나간 것이 인연이 되어 매주 토요일 하는 태극기 집회에 되도록 나가려고 노력하였고, 가끔은 가방에 메구를 넣어 가지고 가서 밤에 시청 광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박자를 맞춰 두드리며 탄핵반대의 흥을 돋우기도 하였다.

근데 하루는 어떤 사람이 메구를 잠시 빌려달라고 하여 빌려 주었는데 그만 깜박하고 돌려 받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그래서 그 메구도 나를 떠나 버렸다.

정말 내가 아끼던 보물이었는데, 누군가 그 메구를 잘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위로를 삼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초등학교 여자 친구에게 그런 사정을 이야기 하였드니 자기 집에 남편이 선물로 받은 메구가 2개 있다면서 1개를 주겠다고 하였다.

모임에서 만날 때 받기로 약속하고 다시 가져오라고 환기시켜 1월 19일 태백산 눈꽃 축제에 갈 때 메구를 선물로 받았다. 참으로 고맙다.

여자 친구는 위 메구로 테극기 집회에 가서 나 대신 잘 사용하라고 하는데 그럴 기회가 있는지 모르겠다.

집에서 두드려 볼 수도 없고 하여, 올 1. 26. 양평 신망원 보육원에 저녁 봉사하러 갈 때 가지고 가서 한번 두드려 보니 그런대로 소리도 괜찮았다. 근데 이를 들어보던 모임 회원들이 전에 것 보다 울림이 덜하다고 한다.

그러나 3번째 인연으로 만난 메구이이 만큼 나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보배인지 모르겠다,

 




 여자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오부자 방자유기 메구

 

 태극기 집회에 가지고 다니면서 치던 김천 방자유기 메구, 다행이 잃어 버리기 전에 찍은 사진이 한장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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