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고추

하일도 2024. 8. 5. 17:22

고추

입이 맵다.

속이 따갑고 화끈거리고 몸에 땀이 난다.

그래도 고추를 먹는다.

시골에서 자랄 때 고추는 늘 밥상에 올라오는 반찬이었다.

어르신들은 끼니마다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몇 개씩 먹는다.

우리도 따라 하다가 혼이 난다.

물을 마시고 맨밥을 먹고 하지만 별 효과도 없다.

매워도 참아야 한다. 그래야 남자가 된다고 배웠다.

해마다 테라스 화분에 고추 모종 15포기 정도를 심는데,

절반은 적당히 매운 종자를, 나머지 절반은 매운 청양고추를 심는다.

고추가 굵어지면 청양고추는 너무 매워서 주로 반찬으로 사용하고,

일반 고추는 풋고추로 된장에 찍어 먹는다.

장마가 길어지자 올해는 유달리 탄저병이 일찍 나타났다.

하루에 몇 개씩 나타나는 탄저병 걸린 고추를 버릴 수 없어 이를 따서

탄저병이 나타난 부위를 오려내고 나머지는 버리지 않고 먹는다.

이 과정에서 고추에 닿은 손가락 부분이 엄청 화끈거리고 얼얼하다.

손가락으로 눈을 만지면 눈이 따갑고 눈물이 난다.

또 실수로 손이 사타구니에 닿으면 찌르듯이 따갑고 화끈거린다.

 

고추는 붉게 익어간다.

장마라 햇살 보기가 어려워 건고추 만들기도 어렵다,

작은 채반에 두고 말리면 탄저병이 기성을 하여

고추가 썩어 절반은 버린다.

고추 배를 갈라 씨를 빼내고 작은 건조기를 사용하여 말리라는 조언을 듣고

며칠 전에 탄저 부위 오려내고 배를 갈라 건조기에 넣고 몇 시간 두었더니

정말로 고추가 잘 말랐다.

건조한 고추에는 더이상 탄저균이 번질 이유가 없다.

2채반 그렇게 하니 벌써 건고추 1근 정도는 마련한 기분이다.

 

같은 땅에서 같은 물을 먹고 같은 태양을 쬐는 식물인데 푸른 고추가

어떻게 붉게 익어가며, 어떻게 매운맛을 낼까 생각하니

참으로 신의 섭리에 감탄한다.

근데 신은 어떻게 고추에게 흉칙한 탄저병이라는 천형을 주었을까?

고추를 괴롭히는 것은 비단 탄저병만이 아니다.

고추 애벌레가 그 매운 고추안에 들어가 속을 갉아 먹는다.

애벌레는 어떻게 매운맛을 잘도 참아 내는 것인가?

이들은 매운맛을 단맛으로 아는가?

 

북한산을 서쪽으로 오르면 첫 번째 봉우리가 족두리봉이다.

족두리봉 정상에는 탄저병이 걸린 바위가 서 있다.

난 이 바위를 탄저바위라고 명명했다.

탄저바위는 탄저병 걸린 것처럼 검게 그을려 있고 군데 군데 흉칙한 흔적이 있다.

탄저바위도 북한산과 같이 수천년간 서울을 지켜왔지만 아직도 늠름하게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2024.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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